……있잖아, 가람아.
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아닌 다른 무수한 세계가 있대. 그곳에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아간다더라고.
몸을 뜨겁게 달구는 열로 인해 얼굴이 발갛게 올라 경황이 없는 너였지만 그 속에서도 너는 꿈을 이야기했다. 그저 이야기했다.
저 너머, 다른 세계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대.
그 세계의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얌전히 누워. 열 더 올라.
행복하면 좋겠다. 정말 많이…….
산 너머의 너머, 그곳을 열에 들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는 말없이 차가운 수건만을 쥐고 있을 뿐이다.
부디 너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기를.
나와 함께할 수 있는 그곳을 보기를.
언제나, 함께 할 수 있기를.
그 부질없는 소망을 가슴 한구석에 한 아름 품어놓은 채.
…열이 떨어지면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산책이라도 하러갈까.
이야- 고집불통 청가람이 무슨 일이지?
시끄러. 좀이 더 나으면, 좀 더 먼 곳으로. 좀 더 먼 곳으로 가는 거야. 그래서 몸이 다 나으면 바다도 가보고.
생각만 해도 좋은데.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도 언제나와 같이 눈을 휘며 웃던 너.
뜨거운 손이 잡아달라는 듯이 내게로 뻗어왔다.
그 손을 잡았다. 열이 올라 한없이 뜨거운 네 손이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질 것만 같다. 좀 더 힘을 주어 잡았다.
제멋대로인 청가람 씨가 말 바꿀지도 모르니까 약속을 받아놔야지. 자, 정말 약속이다?
……그래.
새끼손가락이 걸렸다. 서로의 엄지가 굳게 다짐하듯 맞물렸을 터였다.
그렇게 반드시를 다짐하며 발갛게도 웃었다. 어서 빨리 나아 답답한 방에서나 벗어나고 싶다며. 그리 말했지.
이제는 그렇게 굳게 약속하던 너는 없는데.
[가람은찬]안녕, 주은찬
w.유정
이 세상에 신은 과연 있을까.
그런 대답에 혹자들을 당연하다는 신이 있다고 말한다.
그 멀고도 먼 옛날 옛적, 하늘에서 주작이 강림하여 하늘에 사는 미물들이 인간세계로 내려와 혼란과 비탄에 빠진 인간세계를 구하고 다시금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였다.
허나 주작신이 세상에 내려와 세계를 한번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물들은 끊임없이 인간세계를 탐했고, 그 강구책으로 주작신은 자신의 힘의 일부를 인간에게 내려주어 그 스스로를 지키게끔 만드니, 그 주작신의 힘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자가 바로 주작의 후예라 하더라.
그 후예는 대마다 한명씩 붉은 머리칼을 지니고 태어나는 데, 후예의 타고난 힘만큼 주작의 힘을 빌려 사용하는 자들의 힘마저 결정한다더라. 그래서 후예는 항상, 강하고 아름다우며 주작의 현신이라는 이름답게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그렇게 빛난다더라. 그런 존재라더라.
‘드디어 죽었네요. 정말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죠.’
‘그래도 다행이네. 이제 다음 대 후예가 태어날 테니 준비나 하세.’
‘이번에는 불량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저것을 봐, 주은찬.
신이 있다고 생각해?
주작의 후예는 아름답고, 누구보다 빛나는 존재라 하였어.
그 이름에 걸맞게 빛나는 존재가 있었음에도 그 눈부신 빛에 눈이 먼 자들은 빛에 깔리는 어둠밖에 보질 못한다. 그런 존재다. 그런 존재였다.
그런 존재들이 버젓이 숨을 쉬고 살아가고 있음에도 누구보다도 빛났던 너는 왜 살아가지를 못했나.
넌 왜 죽어야만 했나.
이런 존재를 살리지 못하는 신이라면.
그게 신이라면.
나는 감히 신이란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초라하게 내려앉은 지붕이 우두커니 서있는 그곳에서 쓸쓸히 홀로 눈을 감은 너는
그래도 후예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가는 길에는 많은 사람이 와있었다.
생전 빛을 보지 못한 채 쓸쓸히 죽어갈 날만을 세어가던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밝은 세상의 빛을 보는 날이기도 했다.
아무도 너의 죽음을 슬퍼하지도, 위하지도 않는다.
예의상 이어지는 발걸음과 조소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차가운 액자 속에 갇힌 너의 미소만은 말갛게 빛이 나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북적이던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주변은 고요로 가득 차오르며 하늘에는 달이 뜰 때까지 내내 숨죽여있던 숨을 내뱉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다. 검은 상복을 움켜쥐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말없이 향을 피웠다.
왜 너는 그리도 미련했을까.
왜 너는 그리도 잔인했을까.
내가 많은 것을 바란 것은 아니다. 단지, 죽어가는 너에게 인사를 하고 싶을 뿐이라고.
외롭고 어두운 길로 향하는 너의 손을 잡고 작별을 고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벌겋게 타오른 향이 제 몸을 불태우며 회색의 재만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코끝으로 진하디 진한 향냄새가 감돌았다. 점점 짧게 타오르는 향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것을 짓밟았다.
나는 아직 인정할 수 없다.
너에게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병신 같았던 내가 살아생전 너에게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것을 아직 전하지 못했건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나에게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응?
……은찬아.
볼을 스치고 떠나가는 바람이 매섭다. 가벼운 짐만을 챙긴 검은 가방만을 메고 떠난 발걸음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한겨울의 어느 날, 눈은 시리게도 내리고 있었다.
‘인간의 간절함은 때로는 기적을 일으킨대.’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이 산 너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신당이 하나 있는데, 그 간절함이 하늘에 닿을 정도면, 주작 신께서 그곳으로 친히 내려와 그 인간의 소원을 들어준다더라고.’
‘또 그 소리…신은 없어, 멍청아.’
‘그래도…그래도 말이야. 정말로 그렇다면 좋을 텐데.’
왜 지나가듯, 꿈을 꾸듯 조잘거렸던 네 말이 그 순간 떠올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너의 그 말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거짓말처럼 몸을 일으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네가 말했던 산 너머의 신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은 없다.
나는 당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분명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만날 수만 있다면.
저 만치에서 너무나도 낡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신당이 보였다.
작은 규모의 신당은 타오르는 불꽃을 품은 주작신의 영령이 걸려있다. 그곳으로 홀린 듯이 걸어갔다.
—전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무엇을 팔아넘길 수 있을 터였다.
그 무엇이든 신봉할 수 있을 터였다.
설령 그것이 나 자신의 목숨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