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돌아오는 그 순간은 늘 그렇듯이 갑작스럽다. 순식간에 빼앗겼던 그 날처럼.
*
우주의 끝을 본 적이 있어?
모든 것이 흘러 들어가는 곳이 우주라면,
그 우주에는 끝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니.
*
어쩌면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숨을 쉬고 이렇게 있을 수 있었을까.
기억이 돌아오는 그 순간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 보았던 그 순간들처럼 그 어떠한 거창한 계기 때문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잔인한 우주는 그렇게 늘 고요했고, 가장 소중한 기억을 빼앗아갔던 그 순간처럼 어느 날 갑자기, 아주 작고 사소한 계기로 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던 그 날은. 그 순간은.
투명한 유리잔을 쥐고, 멍하니 출렁이는 그 평면을 멀거니 바라보다, 그러고 보니 이건 팀이 좋아하는 건데. 그렇게 무의식적인 생각을 하다, 팀이 누구였더라?
팀. 아, 나의 친구. 그렇게 기억의 물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어 비틀거리고 있다 보면, 문득 비참함에 입을 틀어막은 채, 그렇게 턱 막힌 숨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를.
너를 어떻게 잊을 수 있었지.
그렇게 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들이 들어, 아무렇지도 않은 그 사소하고 비참한 일상 속에서 난 그 소리 없는 울음을 토해내었다. 어떻게. 어떻게 내가. 네가.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잊을 수가 있었느냐고,
‘그’ 우주가 빼앗아간 것은 비단 기억뿐만은 아니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기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비참함 또한, 거기에 있었다.
*
우주는 끝이 없어?
응. 매일이 새로운 우주가 탄생한단다, 아가야.
끝이 없으면 어떡해?
어떡하긴, 그 영원히 끝나지 않을 끝을 향해 가보면 되지.
“이렇게, 두 손을 잡고.”
*
우리의 시간은 어느 순간, 이렇게 빠르게 흘렀나 보다.
우리는 그 시간만큼 성장했고, 그 성장한 만큼 자라진 못했지만
당장이라도 네가 있는 지구를 향해 셔틀을 타고서라도 달려갈 다리를 붙잡은 것은 함께 돌아온 너와의 사랑스러운 추억만큼이나 묵직한 우리 사이의 고통이었다.
기억이 돌아왔어,
너와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왜, 나는 기억력이 좋다고 네가 말한 것처럼 사소한 것까지도 기억을 되돌려받았는데.
나는 무엇이 그렇게 두렵고 주저해서.
오랜만에 서랍 속 깊숙이에 넣어두었던 술을 꺼내 들었다.
타들어 가는 심정만큼이나 메말라가는 기도였다. 매 순간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기억 속에서 알코올에라도 한 번 기대볼까, 술은 자제해달라 우는 시늉을 해보았던 친구의 말도 무시한 채 멍한 눈으로 뷰 스크린 너머의 찬란한 별들을 바라보다 나는 우연히 걸린 시선 속 술병의 글줄들을 읽는다. 참, 이 술은 팀과 생도 시절에 자주 마시던 건데. 아니, 자주는 아니었지. 그때도 몸이 약했으니 자주 마시면 안 된다, 그녀는 자신과 함께 자주 마셔주진 않았다. 그래도 예외적으로 함께 마실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꼭 이 술을 마셨다. 순전 그녀의 취향이었다. 약해빠진 자신은 술은 자주 마시지 못했기에, 가끔 술을 즐기고 했던 그녀가 좋아하는 것으로 함께 잔을 나누곤 해서.
나는 문득 웃었다. 그렇게 웃다가 울었다. 울면서 웃었다.
참을 수 없는 격정은 한심한 자신을 끝의 끝까지 몰고 간다. 나는 그렇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차마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우주를, 그 너머의 끝을 바라보지 못했다.
아, 나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너와 함께했던 기억을 찾고 있었는데.
정작 찾아버린 기억 속에서 헤매는 나는 모든 게 너를 가리키고 있는 와중에도 뒷걸음질이나 치고 있었다. 참 한심하기도 하지.
팀, 타이미어스. 웬델 타이미어스 강.
날 원망하고 있니?
그도 아니라면.
그 우주의 끝에서 날 기다리고 있니.
*
ㅡ우주의 끝?
ㅡ그래, 그게 뭐든 같이 가자.
그게 어디든 함께 가기로 했잖아.
*
날이 가면 갈수록 선명해지는 차디찬 날의 단면처럼 반짝였고, 그만큼 차가웠다.
한 번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오히려 그 전보다 생생하고 또렷한 순간순간들이 그 이전의 자신이 놓친 것들을 깨닫게 해주곤 한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닌데, 마치 무언가에 막힌 듯 수면 아래로 잠겨가는 순간이라도 떨쳐 일어나 삶을, 시간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쿼터는 침묵 속에 맞이하는 또 다른 고통이자, 날 선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곳이었다.
나는 침대에 털썩 누워 멍하니 그 천장을 바라본다.
이렇게 숨 막히는 정적에 둘러싸여,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노라면 자신은 어느새 그녀를 생각하고 있어서.
모든 것이 흘러 들어가는 우주.
그리고 그 우주의 끝.
끝없이 그 순간을,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은 마치.
우주를 벗어날 수 없는 별들처럼. 나는 너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어서.
이게 바로 중력에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싶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들어 바람 빠진 웃음을 짓다가, 뜨거워지는 눈가를 꾹 눌러 그렇게 눈물을 눌러 참는다.
기억이 돌아오던 그 순간처럼 나는 너를.
너에 대한 내 마음을 문득 깨달아 버려서.
그렇게 참을 수 없이 서러워지고 말았다.
―나를 바라보는 네 눈빛이 힘들었어,
나를 바라보면서 죄책감을 상기시키는 네 모습은 마치 날 닮아있어서.
그래서 숨이 막힌다 생각했는데, 팀.
사실 아니었나봐. 그게 아니었어.
아니, 그런 것도 있겠지. 그럴 거야.
그런데 말이야, 팀.
나는 고요한 정적 속에 울리는 패드의 알림에 흐린 시야로나마 패드를 켰다.
그런데, 팀.
내 소중한 사람아.
담담히도 꺼내어지는 네 말마디에 흐려진 시야 속에서 바보같이 웃다가도, 감히 바라서는 안 될 그 단 한마디를 속삭여주는 너를 담은 패드를 끌어안고서는, 새어 나오는 울음을 삼킨 채 무너지듯 잠겼다. 잠겨 내려갔다. 그렇게 끝없이 잠겨 내려갔다.
팀, 티미. 단 한 명뿐인 사람아.
마치 기적과도 같아서, 이런 나라도 사랑한다 말해주는 네가 마치 허상 같아서 나는 패드를 켜 다시, 다시. 네가 있을 그곳을 향해, 똑바로 바라본 채 그 무거운 말마디를 열었다.
꿈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나는 내 기억을 찾았고, 그리고 나는 이제 알아버렸어.
팀, 그대야.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
함께 가자, 우주의 끝으로.
그 영원히 오지 않을 끝을 향해, 다시는 놓지 않을 손을 잡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