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양과 갈림길

2021. 10. 30. 03:08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기억이 돌아오는 그 순간은 늘 그렇듯이 갑작스럽다. 순식간에 빼앗겼던 그 날처럼.

 

*

 

우주의 끝을 본 적이 있어?

모든 것이 흘러 들어가는 곳이 우주라면,

그 우주에는 끝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니.

 

*

 

어쩌면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숨을 쉬고 이렇게 있을 수 있었을까.

기억이 돌아오는 그 순간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 보았던 그 순간들처럼 그 어떠한 거창한 계기 때문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잔인한 우주는 그렇게 늘 고요했고, 가장 소중한 기억을 빼앗아갔던 그 순간처럼 어느 날 갑자기, 아주 작고 사소한 계기로 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던 그 날은. 그 순간은.

투명한 유리잔을 쥐고, 멍하니 출렁이는 그 평면을 멀거니 바라보다, 그러고 보니 이건 팀이 좋아하는 건데. 그렇게 무의식적인 생각을 하다, 팀이 누구였더라?

. , 나의 친구. 그렇게 기억의 물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어 비틀거리고 있다 보면, 문득 비참함에 입을 틀어막은 채, 그렇게 턱 막힌 숨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를.

너를 어떻게 잊을 수 있었지.

그렇게 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들이 들어, 아무렇지도 않은 그 사소하고 비참한 일상 속에서 난 그 소리 없는 울음을 토해내었다. 어떻게. 어떻게 내가. 네가.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잊을 수가 있었느냐고,

우주가 빼앗아간 것은 비단 기억뿐만은 아니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기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비참함 또한, 거기에 있었다.

 

*

 

우주는 끝이 없어?

. 매일이 새로운 우주가 탄생한단다, 아가야.

끝이 없으면 어떡해?

어떡하긴, 그 영원히 끝나지 않을 끝을 향해 가보면 되지.

 

이렇게, 두 손을 잡고.”

 

*

 

우리의 시간은 어느 순간, 이렇게 빠르게 흘렀나 보다.

우리는 그 시간만큼 성장했고, 그 성장한 만큼 자라진 못했지만

당장이라도 네가 있는 지구를 향해 셔틀을 타고서라도 달려갈 다리를 붙잡은 것은 함께 돌아온 너와의 사랑스러운 추억만큼이나 묵직한 우리 사이의 고통이었다.

 

기억이 돌아왔어,

너와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 나는 기억력이 좋다고 네가 말한 것처럼 사소한 것까지도 기억을 되돌려받았는데.

나는 무엇이 그렇게 두렵고 주저해서.

 

오랜만에 서랍 속 깊숙이에 넣어두었던 술을 꺼내 들었다.

타들어 가는 심정만큼이나 메말라가는 기도였다. 매 순간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기억 속에서 알코올에라도 한 번 기대볼까, 술은 자제해달라 우는 시늉을 해보았던 친구의 말도 무시한 채 멍한 눈으로 뷰 스크린 너머의 찬란한 별들을 바라보다 나는 우연히 걸린 시선 속 술병의 글줄들을 읽는다. , 이 술은 팀과 생도 시절에 자주 마시던 건데. 아니, 자주는 아니었지. 그때도 몸이 약했으니 자주 마시면 안 된다, 그녀는 자신과 함께 자주 마셔주진 않았다. 그래도 예외적으로 함께 마실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꼭 이 술을 마셨다. 순전 그녀의 취향이었다. 약해빠진 자신은 술은 자주 마시지 못했기에, 가끔 술을 즐기고 했던 그녀가 좋아하는 것으로 함께 잔을 나누곤 해서.

 

나는 문득 웃었다. 그렇게 웃다가 울었다. 울면서 웃었다.

참을 수 없는 격정은 한심한 자신을 끝의 끝까지 몰고 간다. 나는 그렇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차마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우주를, 그 너머의 끝을 바라보지 못했다.

, 나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너와 함께했던 기억을 찾고 있었는데.

정작 찾아버린 기억 속에서 헤매는 나는 모든 게 너를 가리키고 있는 와중에도 뒷걸음질이나 치고 있었다. 참 한심하기도 하지.

 

, 타이미어스. 웬델 타이미어스 강.

날 원망하고 있니?

그도 아니라면.

그 우주의 끝에서 날 기다리고 있니.

 

*

 

ㅡ우주의 끝?

ㅡ그래, 그게 뭐든 같이 가자.

그게 어디든 함께 가기로 했잖아.

 

*

 

날이 가면 갈수록 선명해지는 차디찬 날의 단면처럼 반짝였고, 그만큼 차가웠다.

한 번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오히려 그 전보다 생생하고 또렷한 순간순간들이 그 이전의 자신이 놓친 것들을 깨닫게 해주곤 한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닌데, 마치 무언가에 막힌 듯 수면 아래로 잠겨가는 순간이라도 떨쳐 일어나 삶을, 시간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쿼터는 침묵 속에 맞이하는 또 다른 고통이자, 날 선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곳이었다.

나는 침대에 털썩 누워 멍하니 그 천장을 바라본다.

 

이렇게 숨 막히는 정적에 둘러싸여,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노라면 자신은 어느새 그녀를 생각하고 있어서.

모든 것이 흘러 들어가는 우주.

그리고 그 우주의 끝.

끝없이 그 순간을,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은 마치.

우주를 벗어날 수 없는 별들처럼. 나는 너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어서.

이게 바로 중력에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싶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들어 바람 빠진 웃음을 짓다가, 뜨거워지는 눈가를 꾹 눌러 그렇게 눈물을 눌러 참는다.

 

기억이 돌아오던 그 순간처럼 나는 너를.

너에 대한 내 마음을 문득 깨달아 버려서.

그렇게 참을 수 없이 서러워지고 말았다.

 

나를 바라보는 네 눈빛이 힘들었어,

나를 바라보면서 죄책감을 상기시키는 네 모습은 마치 날 닮아있어서.

그래서 숨이 막힌다 생각했는데, .

사실 아니었나봐. 그게 아니었어.

아니, 그런 것도 있겠지. 그럴 거야.

 

그런데 말이야, .

 

나는 고요한 정적 속에 울리는 패드의 알림에 흐린 시야로나마 패드를 켰다.

 

그런데, .

내 소중한 사람아.

 

담담히도 꺼내어지는 네 말마디에 흐려진 시야 속에서 바보같이 웃다가도, 감히 바라서는 안 될 그 단 한마디를 속삭여주는 너를 담은 패드를 끌어안고서는, 새어 나오는 울음을 삼킨 채 무너지듯 잠겼다. 잠겨 내려갔다. 그렇게 끝없이 잠겨 내려갔다.

 

, 티미. 단 한 명뿐인 사람아.

 

마치 기적과도 같아서, 이런 나라도 사랑한다 말해주는 네가 마치 허상 같아서 나는 패드를 켜 다시, 다시. 네가 있을 그곳을 향해, 똑바로 바라본 채 그 무거운 말마디를 열었다.

 

꿈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나는 내 기억을 찾았고, 그리고 나는 이제 알아버렸어.

, 그대야.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

 

함께 가자, 우주의 끝으로.

그 영원히 오지 않을 끝을 향해, 다시는 놓지 않을 손을 잡고서.

Posted by 유정s
,



 

지구에서 보내는 시간은 짧았다.

그렇기에 더없이 부족하기만 시간이었기 때문에.

 



아직은 채 새벽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저도 모르게 떠진 눈은 몇 분간 가만히 천장 위를 바라보았던가. 무의식적으로 점등을 외칠 뻔했던 졸음에 잠긴 목소리는 제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팀의 모습에 아차 싶었다. 잠들어 있는 사람을 깨우기는 싫었기에 네 고동빛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주다, 이내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 이르게 찾아온 새벽 속의 아침은 저로도 족했다.

 


그렇게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서면, 간밤에는 끊이지 않게 복작였을 거실을 지나쳐 가만히 테라스의 문을 연다. 그 열린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은 채 밝아지지 않는 새벽의 바람. 커피라도 타서 이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면 좀 더 좋았으려나 곱씹어 보다가도 이내 커피는 마시지 말라며 부드럽게 타일렀던 네 목소리가 떠올라 이내 말아버리고 만다. 그렇게 익숙하고 향기로운 커피의 향도, 곁에 자리하고 있었던 따스한 체온 또한 있지 않아, 테라스를 딛고 서있는 건 오롯한 자신. 채 사라지 않은 머리 위의 우주와, 수많은 별과, 간 밤에 스쳐 지나갔던 잃어버린 과거의 조각. 그 수많은 것들이 뒤엉켜버렸기 때문이었다.

 


ㅡ니나.’

 


지금보다는 더 어렸고, 어린 만큼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내가,’

 



내가 널 죽였어.

 



그 시절의 빼앗긴 이야기들이 문득 꿈속에서 떠올랐기 때문에.

걸치고 나온 카디건을 조금 더 여몄다. 더디게만 흘러가는 이 새벽 속에 잠기는 것은, 뜻하지 않게 찾아왔던 기억의 단편.

 

바람이 분다. 살갗 위로 스치는 그 감촉이 느릿하게 타고 흘러들어와, 드문드문 비어 있는 기억을 찾아 그 서리를 품은 채 또아리를 틀었다. 마치 제가 있어야 할 곳은 그곳이라는 듯이.

 




*

 




생각해 보면, 그 전까지 부족한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똑똑한 머리와 재능.

훌륭하신 부모님과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해주는 언니. 부족하지 않은 환경. 사실 모든 것이 그랬지. 부족한 줄 모르고 살다가, 잃어버려서야 알게 되는 게 그 풍족함이라고 누군가는 그랬다. 그러니까,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병으로 쓰러졌던 일곱 살의 그 해 말이다.

 

 


아직은 어렸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그랬겠지만,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과학이 발전하고 발전해 저 미지의 우주까지 나아가는 게 지금의 시대라는 데, 그 시대에서도 치유하지 못하는 희귀병이 자신에게 있을 줄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온 세상이 노래지다 못해 희게 질려서,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다가 관두었다. 몸은 점점 질려가는 백지장처럼 나빠져만 가고 이러다가 온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지. 그게 다가 아닌, 저가 아프기 시작하자 온 집안이 마치 죽음을 직전에 앞둔 듯이 슬픔에 휩싸였던가, 그래서 언니는 제 손을 붙잡고 우는 듯 말았던가. 확실한 것은 저 하나로 인해 부족함이 없었던 그 삶이, 그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병마에 드리워진 듯 좀먹혔다는 것이었다.

 


병실 바깥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 좋아했던 여름이 찾아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그 시간엔 그저 창문 틈으로 쏟아지는 여름의 햇살 한 자락이라도 잡아보려 손을 뻗어, 시간이 흐르면 찾아오는 어두운 밤의 수놓아지는 별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저 수 많은 별들 사이로 헤쳐나가는 기분은 무엇일까. 병든 몸은 여기에 있지만 꿈 속에서라도 그 어드메에서 만난 고래의 등을 타고 넓은 우주를 유영하던 시간들,

 


아마 그때부터였겠지. 우주로 향하는 게 일생의 꿈이자 목표가 된 것이.

잠에 들면 여전히도 꿈속에서 만난 환상의 존재와 함께 별들 사이를 걷곤 하던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을 돌아보자면, 사실 그렇게 큰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어린 마음에 자유로워 지고 싶었던 순간엔 하늘을 바라보며 우주를 꿈꿨기 때문에,

 


조금쯤은, 막연히 생각했던 그 길을 따라 걸었을지도 모르지.

어린 시절의 아팠던 기억은 강했고, 그 시절의 꿈 또한 선명하게 드리우는 법이었다. 그래서, 막연히 생각하고 생각해왔던 그 기억을, 꿈을 따라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 걸었기 때문에, 아카데미 입학 통지서를 받고도 조금쯤은 정신이 멍했다.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생각 한 막연한 일이 현실로 손에 쥐어서?

 


아니, 그게 아니었다. 감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든 입학 통지서. 그리고 갖춰 입은 붉은색 제복은 참으로 이상해서, 마치 있어선 안 될 곳에 끼어든 불청객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각자 저  마다의 이상과 꿈을 안고 찾아드는 별들의 공간에서, 단지 그 어렸을 때의 기억만을 품에 안고 고찰도 없이 끼어든 이 존재란 무엇이었을까?

 


아직은 어렸던 시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소한 계기일지라도 무언가를 시작함에 있어 모자람이 없다는 것을 아직은 몰랐기에, 그저 불어오는 작은 바람에도 여직 자라지 못한 정신은 사소하게 흔들려서, 꼬박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물론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런 나의 바보같은 생각을 바로잡아준 ‘-’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

 

분명히 존재했던 기억 속의 ‘-’는 마치 가위로 그 부분만 잘린 채 도려졌기 때문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의 범람 속에서 마치 허리가 잘려진 듯 그 부분에서만 제자리였다. 저 멀리에서 희끗하게 올라온 태양이 보인다. 새벽도 이제는 끝인 모양이지.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우주라고, 그 꿈을 조금 더 확고하게 지켜준 너.

이제는 그 존재가 누구인지는 아는데, 기억 속의 너는 여전히 난도질을 당한 듯이 제자리다.

선명하게 푸른 도화지에 그 부분만 먹을 칠한 듯이 생각이 나지 않아, 꼬박 차오르는 설움에 머리를 매만져 보아도 떠오르지는 않았기 때문에

 


안젤라.’

 


떠오르는 것은 네가 불러주었던 그 이름이었다.



아무도 알지 못했던, 그 천사의 이름을.

Posted by 유정s
,